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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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12일 주일 오전예배(눅 16:19-31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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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탄방교회1
작성일17-03-12 00:00 조회3,6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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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2 주일오전예배 목사님 설교 요약


[눅 16:19-31]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본문은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현세와 내세를 통해 우리들에게 이야기해줍니다.

1. “이름 없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19-22)

부자는 세상에 있을 때 매일 좋은 옷을 입고 친구들을 불러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고, 영원히 잊혀질 것이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는 가난하고 형제와 친구가 없고 몸에 병까지 들어서 거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거나 눈여겨보거나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나사로를 기억하고 알아주셨는데 비록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없지만 천국에 들어간 것을 보면 믿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나의 가르침, 도우심”으로 신앙을 가진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인 것이 죄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입니다. 부자가 연락하고 방탕했는데 하나님 믿지 않는 자의 특징의 단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사로는 악성 종기가 나서 개들이 상처를 핥았고 병들어서 움직일 수 없어서 부자의 집 문 앞에서 부스러기를 받아먹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사로는 끝까지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실한 신자라도 가난하고 병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주이신 예수님도 가난하셨고 비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에 비하면 순간일 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죽었습니다.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부자는 좀 더 살았으면 한탄하면서 죽었을 것이고, 나사로는 평안한 가운데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가신 것인데, 세상에서 하루 먼저 죽으면 내세에서는 하루 먼저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후에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갔습니다. 세상에서의 타향 생활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안함과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땅에서는 거지로 병자로 비참하게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를 치루고 좋은 장소에 안장하고 큰 비석을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육신은 화려하게 꾸민 무덤에 들어갔지만 영혼은 지옥에 갔습니다. 그때 비로소 후회했으나 때가 늦었고, 기회는 다 지나갔습니다.

2.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

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 믿는 순간 영생을 얻고 구원 받습니다(요 5:24)(요 6:47)(행 4:12). 그러나 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② 사치하고 방종했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즐겼는데 자기를 과시하면서 향락으로 시간, 물질과 정욕을 낭비했습니다. 부자라는 것은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 물질, 기술을 바로 사용할 때 덕을 세우고 유익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사치하고 방탕하고 자기만 위해서 쓰는 것은 죄입니다.

③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긍휼 없는 것도 죄입니다(약 2:13)(잠 17:5).

④ 육신의 쾌락에만 관심을 갖고 자기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는데 육신은 영혼이 쓰는 장막에 불과합니다.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내세를 모르고 다 육신을 위해서 고민하고 육신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가야되는데 얼마나 허무합니까? 부자는 영원한 내세와 심판을 믿지 않음으로 쾌락을 즐겼고 나사로는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두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까? 한평생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잘살고 못사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살 때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진리대로 걸어가는 삶보다 귀한 삶은 없습니다. 억만금을 주고도 자기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영원한 것에 근거한 가치관, 천국을 기준으로 하는 가치관을 갖고 오늘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3. “부자의 간청”(23-28)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극도의 고통 중에 멀리 천국에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부르짖습니다(24). 하지만 ‘고통 가운데서 꺼내달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 길을 택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지옥에 대해서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않았는데 직접 가서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3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물 한방울을 요구합니다. 지옥은 뜨겁고 목마른 곳인데 물이 한방울도 없습니다. 지옥은 조금의 위로나 생명의 빛이 없습니다. 지옥은 결코 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하나님이 지옥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양심이 지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마 10:28)(마 18:9).

부자와 나사로의 처지가 얼마나 비교되고 기막힌 일입니까? 지옥에 간 사람은 세상살 때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멸시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지옥에 보내셔서 지옥을 겪게 하시고 천국을 보여주심으로써 깨닫게 하셨습니다. 부자는 물한방울도 거절당합니다. 왜냐하면 부자는 나사로가 먹는 부스러기에도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한가지를 더 부탁합니다.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자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고 간구합니다(27-28). 여러분, 이 부자의 음성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모든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의 부르짖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5.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어라”(29-31)

부자의 부탁을 들은 아브라함은 나사로를 보낼 것 없이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성경말씀은 천국과 지옥, 선악간에 상벌, 그리고 영생의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세상에 나가서 말해주면 믿을 것이라 말합니다(30-31).

그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부자는 하나님도 알고, 아브라함, 모세, 성경도 압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고 믿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지식과 믿음은 다릅니다. 천국, 지옥이 있다는 것을 대개는 알지만 천국과 지옥을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해줘도 이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믿지 않은 자가 많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롬 10:17). 성경은 읽고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줍니다.

현재 아무리 건강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미래 소망이 없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 죄용서 받아 천국에 간다는 확신만 있다면 나사로처럼 빈궁하고 병들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밝은 소망 가운데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의 삶, 승리자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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