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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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19일 주일 오전예배(마태복음 5:21-26 살인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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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탄방교회1
작성일17-03-19 00:00 조회3,9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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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1-26] “살인치 말라”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모든 살인의 동기가 미움에서 시작됩니다. 미움에서 분노가 나오고, 악담이 나오고, 저주가 나오고, 결국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가들(바리새인)이 율법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담긴 참된 정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율법보다는 조상들의 유전, 전통을 더 중시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웃은 이방인들, 나그네들을 다 포함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자기 민족으로만 한정하여서 동족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내적 거룩함을 강조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도 거룩해야 된다면서 밖에서 들어오면 손과 발을 씻고, 목욕한 후에 음식을 먹으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인 것입니다. 결국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내적 거룩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1.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됨”(21-22)

바리새인들은 살인죄(6계명)를 행동의 결과로서만 보았습니다. 살인의 내적 이유와 동기는 보지 못하고 오직 외적 결과만 보고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미워해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계명의 깊은 뜻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①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고 했는데(22上), 심판은 장로 7명으로 구성된 지방 재판소에서 재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형제를 향해 분노한다고 해서 재판을 받지 않지만 형제를 향해 노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②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라고 했는데(22中), 분노가 악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가의 원래 뜻은 속이 빈 놈, 쓸모 없는 놈으로 바보와 비슷한데, 이렇게 욕설하는 자는 70인으로 구성된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했다고 거기 끌려가는 자가 없는데 형제에 대해서 악담으로 욕하는 자는 최고법정에서 재판받을만한 죄라는 것입니다.

③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는데(22下), 미련한 놈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과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라는 뜻으로 저주에 가까운 욕입니다. 우리의 삶,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차원이 굉장히 높은데,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자리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미움이 발전해서 노하는 것이 나오고, 욕설이 나오고, 저주가 나오고, 결국 실제적인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약 1:20에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를 들면서 의분(義憤)을 말합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 것을 보고 자기도 예수님처럼 분노한다고 말합니다(마 21:12).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혁명가라고 말하면서 말보다 행동(폭력)이 더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진노하신 것은 심판주로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분노는 자기 이해관계, 명예, 위신, 체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 때문에 분내는 것은 의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와 불의를 보고 분노할 수 있지만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도 죄를 미워하시되 사람은 미워하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마 5:44).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노하는 줄 모릅니다. 분내고 노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2. “온유한 태도로 대할 것”(잠 15:1)

① 분내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방에게 온유로 대해야 합니다(잠 15:1). 이것이 성도의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애매하게 고난을 많이 당하시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면서도 미움을 받으셨지만 감정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대하셨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낼 때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같이 노하니까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치아는 여러 개가 있어도 오래 쓰다보면 깨지지만, 혀는 하나밖에 없어도 온유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평생 쓰고도 남습니다. 온유한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 시기, 중상모략, 멸시,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것도 “라가”입니다. 엡 5:4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고, 엡 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덕목, 자세입니다.

③ “미련한 놈”이라고 욕한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갈 만한 죄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비판으로 ‘하나님, 왜 저런 사람을 만들었습니까?’라고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람이 입을 벌렸다 하면 죄를 많이 짓습니다. 죄악된 말 한마디로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립니다. 마귀가 은혜를 빼앗으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분내고 고함지르면 은혜가 없어집니다. 자기가 보기에 부족한 사람을 보고 ‘왜 저런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시고 목적이 있으셔서 내신 것이기 때문에 몹쓸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잠 16:4).

3.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23-26)

① 노를 발했으면 그 노를 실수로 보지 말고 죄로 인정하십시요. ‘죄를 지었습니다. 살인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회개하십시요. 분노가 일어날 때 지체하지 말고 무서운 죄로 여기고 즉시 화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배도 귀하고, 예물도 귀하지만 미움과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예배드리면 안됩니다(23-24). 미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십니다(시 66:18).

25上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했습니다. 송사하는 자는 양심을 가리킵니다. 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죄를 짓기 전입니다. 즉 죄를 지으려는 길로 걸어갈 때 양심이 가책하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25中에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 내어주고”라고 했는데, 재판관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심의 송사를 어기고 죄를 범하면 율법이 정죄한다는 것입니다(요 12:48).

25中에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라고 했는데, 관예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집행하는 자, 즉 형리를 가리킵니다. 관예에게 내어주면 이제는 자유가 없어지는데 관예는 죄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25下에 옥에 가두게 되는데 옥은 영적 흑암을 가리킵니다. 고통을 당하며 심령의 자유가 없어집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죄인이라는 두려움이 있고, 죄에 매여서 살게 됩니다. 결국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해지기 전에 풀어야 하는데, 분을 풀지 않으니까 점점 커져서 진짜 살인을 하게 됩니다(가인과 아벨). 미움 자체가 범죄의 시작입니다. 미워하면 자기 손해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지극히 고상하고 높고 그 진리대로 살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진리에 능력이 있기에 진리대로 믿고 실천하는 자가 강한 자인 것입니다.

26절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고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라고 했는데, “호리”는 로마의 동전으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철저히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진실로 철저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죄짓고 변명하는 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자, 원수된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나도 하나님께 죄 용서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기 까지 회개해야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으십시요. 회개하고 용서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고 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입니다. 사람과 막히면 하나님과 막힙니다. 참으로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주님의 용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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