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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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4 주일오전예배 설교(요한복음 1장 43-51절/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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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10-04 15:26 조회8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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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z08yNOMF9oA

본문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내용입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라고도 부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43절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이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자 빌립은 두말없이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즉각적인 결단과 순종이 참 놀랍습니다. 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1. 빌립의 전도와 나다나엘의 반응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이분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입니다.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면서 갈릴리를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은 그 갈릴리 중에서도 작은 촌 동네입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왕궁에 나실 것이며 훌륭한 가문을 통해서 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 얽매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편견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만나보지도 않고,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 중에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면서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비판을 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정말 용감하게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진짜 아는 사람들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정말 안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 용감하게 비판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다시 말했습니다. “와서 보라(46절)” 예수님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예수님을 직접보고, 직접 말씀을 들어보고, 사실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만나보면 알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 이것은 어느 시대 누구나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도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생길 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도 친구를 따라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2. 예수님이 나다나엘에 대해 한 말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다나엘을 칭찬하고 그의 좋은 점을 말해주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에게 잘못이 없었겠습니까? 실수가 없었겠습니까? 방금도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덮어버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의 좋은 점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본받고 싶고, 닮고 싶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합시다. 장점을 말해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줍시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칭찬합시다.
또 하나 살필 것은 예수님이 나다나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을 모르고 있었는데 주님은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다나엘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자세히 아십니다. 47절에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참 신자다’는 뜻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는 속에 거짓과 외식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간교하게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기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찬사입니다. 신자에게 있어 진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를 찾으시고, 진실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사람이 모든 면에 양심을 쓰고 진실해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상대하는 신앙생활은 더욱 진실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외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벌 받을 일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7번이나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반대로 시편 51:6에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성도의 생명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일을 했다면 찾아서 회개하고 양심을 똑바로 쓰며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도 진실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겉모습이 아닌 “그 속”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겉만 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외모에 치중하고 간판만 좋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속을 보시고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임을 아시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속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3-4에 보면 겉모습만 단장하면서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만 꾸미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속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정하고 알아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필요도 없고 또 사람들이 많이 알아준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내 속을 보시고 나를 인정해주신다면 그것보다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나다나엘의 속을 다 보시고 아셨습니다.

3. 나다나엘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48절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떻게 아시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이스라엘 사람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조용한 묵상의 시간을 가지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며, 오실 메시야를 묵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주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은 내가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다. 우리가 어디서든지 기도하면 주님은 아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마태복음 6:4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나다나엘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49절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믿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자기의 은밀한 기도 생활을 아시고, 자기의 영적 상태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본 것은 은밀한 것이요,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더 큰 일은 5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잘 때 하늘이 열리고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은 사닥다리가 섰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다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것이 열리고 누구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앞으로 될 일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은 미리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될 것들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가 나갈 길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척하는 것은 교만한 일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시편 139편에 보면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나의 모든 행위도 아십니다. 혀의 말도 다 아십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가 겉으로는 주님께 입을 맞추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팔고 배반한 것을 아셨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땅 값을 속이고 거짓말 한 것도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시고 누가 정말 바른 기도를 했는지 평가하셨으며 누가복음 21장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연보를 보시고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했는지 평가하셨습니다. 과시하며 드린 헌금과 진실한 헌금을 구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밀려와서 접촉했는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매 주일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오지만, 주님은 누가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지는지 바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고 계십니다. 몸과 마음과 힘을 바쳐 예배하는지 주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사람에게는 적당하게 위장하고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다니엘처럼 속에 간사한 것이 없어야 참 이스라엘 사람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을 잘 가꾸고 만들어서 주님의 인정을 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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