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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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1 주일오전예배 설교(룻기 1장 15-22절/위대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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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2-21 15:24 조회1,1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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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DOt1rYkAmEo

지난 주 우리는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의 만류를 듣고 되돌아간 오르바와 끝까지 나오미를 붙잡고 따라가는 룻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룻의 위대한 결심을 살피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1. 돌아간 오르바(15절)
먼저 나오미를 떠난 오르바에 대해서 조금 더 살피겠습니다. 오르바는 모압 여인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평생 우상을 숭배하며 죄짓고 살다가 멸망할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오르바가 나오미의 가정으로 시집을 오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오르바는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시어머니 나오미가 먼저 ‘너희는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오르바는 다행이다 싶었을 것입니다. 오르바는 한두 번 사양하다가 결국은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을 고했습니다(14절).
오르바가 돌아간 것은 단순히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그의 백성과 그의 신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15절에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오르바는 나오미의 집에 시집와서 잠시 하나님을 섬기다가 다시 불신앙의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계기로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예전의 믿지 않던 상태로 되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오르바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만 보고 믿음의 가정을 떠난 것입니다. 아마 ‘늙은 시어머니 따라 가봐야 좋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남편 얻을 소망도 없고, 자식 둘 소망도 없고,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죽도록 고생만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오르바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오르바의 이름이 더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가 믿음을 버렸을 때 구원도 생명도 천국도 다 잃었습니다. 오르바는 복을 받을 뻔했는데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오르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룻의 결심(16-18절)
룻은 시어머니를 붙쫓았습니다(14절). 절대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르바와 룻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바가 시어머니를 떠나 돌아갑니다. 룻은 혼자 남았습니다. 처음부터 혼자 있는 것보다 같이 가다가 한 사람이 돌아가 버리면 더 갈등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오르바가 떠난 후에도 룻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룻에게 시어머니 나오미는 다시 한번 권했습니다. 15절에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러자 룻은 그런 말씀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16절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이어지는 룻의 고백이 나옵니다(16-17절).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첫째.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가시는 베들레헴에 나도 가겠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신앙의 인도자인 어머니 따라가서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고 힘든 길이라도 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도 주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4에 보면 구원받은 144000의 특징이 나오는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둘째,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 형편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에 고생할 것이 뻔합니다. 시어머니 따라가다가 들에서 노숙할 수도 있고, 남의 집에 세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거기 머물겠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 계시는 곳이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셋째,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룻은 지금까지는 모압의 국적을 가진 모압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나라에 대한 모든 미련과 애착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국적을 가지고 세상 나라에 속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천국 시민이 되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리며 사는 백성입니다.
넷째,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이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시어머니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시어머니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따라가면 남편을 얻을 소망도 없고, 의식주 생활도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행복이나 출세나 성공을 다 포기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포기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룻은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어머니가 계신 그 땅에 묻히겠다는 것입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이것은 일종의 서약이고 맹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입니다. 이 결심이 룻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주님을 넣어서 읽어보십시오.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룻의 고백을 들은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습니다. 룻의 결심이 너무나 확고하고 분명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말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시험이 옵니까? 왜 자꾸 유혹합니까? 왜 마음이 자꾸 흔들립니까? 왜 갈등이 많습니까? 결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단들이 계속 연락하면서 흔들려고 합니까? 내가 흔들리니까 계속 흔드는 것입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단호함을 보이면 세상도, 이단도, 원수도 흔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굳은 결심과 각오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인생은 끝없이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도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룻과 오르바와 출신이 같습니다. 둘 다 모압 여자였습니다. 둘 다 나오미의 가정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그리고 둘 다 남편을 잃었습니다. 둘 다 아기가 없었습니다. 둘 다 큰 불행을 당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인생의 끝이 완전히 다릅니다. 뒤에 나오지만 룻은 보아스를 만나 재혼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고 무너진 나오미의 가정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자손이 다윗의 가문을 이루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룻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선택하고 결단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출발은 똑같은데 끝은 너무나 다릅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3. 나오미가 돌아옴(19-22절)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10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이지만 자신의 초라한 몰골로 인하여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내리시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나오미에게 룻이 함께 했습니다. 19절에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22절에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나오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며느리 룻은 나오미에게 큰 힘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혼자 돌아올 뻔했는데 룻이라는 든든한 위로자가 있었습니다. 두 여자 모두 힘없는 과부이지만 함께 있으니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둘째. 나오미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 돌아왔습니다(22절). 베들레헴에 돌아온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추수 때이므로 먹을 것이 넉넉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굶지 않게 하셨고,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함께 돌아온 룻이 추수하는 곳에 나가 주운 이삭으로 나오미는 먹고 살았고 그러던 중에 보아스를 만나서 나오미의 집은 회복되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1절). 자기 이름이 지금 형편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즐겁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의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숨기거나 거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참아내고 있습니다.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은 더 어렵습니다. 나오미는 그런 아픔과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고백합니다. 19절과 20절에 보면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 자기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으나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스리고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당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장하신 분이 전능하신 여호와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전능자를 바라보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지만 채우실 능력도 있습니다. 괴롭게 하셨지만 즐겁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라가 되게 하셨지만 다시 나오미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드셨습니다.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룻의 위대한 결심을 보았습니다. 오르바가 떠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굳은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여러분을 지켜주고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결심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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