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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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주일오전예배 설교(룻기 4장 1-10절/신을 벗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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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3-21 15:17 조회1,1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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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SxDrGOF50eE

지난주에 우리는 서로를 위하며 배려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며느리에게 안식할 곳을 찾아주려는 시어머니 나오미, 시어머니의 말씀에 다 순종하는 며느리 룻, 몰락한 친척을 위해서 기업 무르는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보아스가 그들입니다. 오늘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는데 그 친족이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다가 손해가 날까 봐 무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결국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게 됩니다.

1. 성문에 올라가 앉은 보아스
1절에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거기 앉았습니다. ‘성문’이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성문 입구의 넓은 장소로서 백성들의 모임의 장소로 쓰였고, 특별히 소송 문제나 일상생활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재판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간 이유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마침 기업 무를 자격이 있는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불러서 성문에 앉게 했습니다.
2절을 보면 보아스는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고 그 사람들 앞에서 룻의 기업 무르는 일을 처리합니다. 이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합법적으로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증인이 됩니다(9, 10, 11절). 이렇게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보아스는 이와 같은 공적인 증거를 받지 않고도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직접 청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훗날 누구의 오해나 비난을 받지 않도록 공정한 절차를 밟았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옳은 일을 하다가도 공연히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기업 무르는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그의 인생이 변하고,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룻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보아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애써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2. 기업 무르기를 포기한 사람
성문에서 이루어진 재판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서 장로들(증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때 마침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가까운 친척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불러서 나오미 가정의 사정을 설명하고 기업 무를 자격이 있는 그 친척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 사람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3-4절).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일을 하게 되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5절에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이미 다른 사람의 밭이 된 나오미의 땅을 사서 그 땅을 나오미에게 주어야 하고 또 룻을 아내로 맞아 죽은 엘리멜렉의 대를 잇게 해주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기업 무르는 일을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왜 안 하겠다고 했을까요? 6절에 보면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 것 같으니까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처음에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서 무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땅만 무르는 것인 줄 알고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그 사람은 기업 무르는 일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친척의 기업을 사서 그 땅을 갖는 줄 알고 기업을 무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면 나오미 가정에는 자식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상속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상속자가 없는 땅을 사서 기업을 무를 경우 그 땅의 소유권을 영원히 자기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업을 확장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보면 희년 제도가 있습니다. 희년 제도에 의하면 남의 땅을 샀다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속자가 없으면 돌려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과 결혼하여 그 집의 대를 이어가도록 만들어주면 그 땅은 룻의 후손 즉 죽은 엘리멜렉의 후손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을 물려주어도 그것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는 결국 손해를 보게 됩니다. 즉 자기 가문이 아닌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게 되므로 자신에게 이익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업을 무를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이 사람은 친척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나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만 계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재산에 손해날 것에 대해서만 걱정을 했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조금도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의 신을 벗었습니다(7-8절). 신을 벗어주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을 벗기는 것은 모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신명기 25:9에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그의 신을 벗기고 그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했습니다. 얼마나 모욕적이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수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신을 벗어주면서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했습니다(8절). 자기는 손해 보기 싫어서 안 하면서 보아스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손해 보지 않으려고 기업을 무르지 않다가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는 룻의 남편이 될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1절을 보면 ‘아무개여’라고 했습니다. “아무개여”라는 말은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뺀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알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다가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3. 기업 무를 권리를 산 보아스
9절에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보아스가 기업 무를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룻을 위하여 기업을 무르기로 했습니다. 사실 친척이 팔아버린 땅을 사서 그 친척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식을 낳아서 남의 이름으로 대를 이어가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렇지만 보아스는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고 희생하는 일이지만 남이 가지고 있던 권리까지 사서 자기가 기업 무르는 일을 합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잘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는 것이고 옳은 일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그 기업 무를 생각을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본래부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남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보아스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룻과 결혼을 하고 룻기의 아름다운 인물로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남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희생이 우리에게 영원한 복으로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까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르는 일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롯기 3:13에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여기에 보면 “기업 무르는 자의 책임”이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보아스는 친족으로서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아스의 마음속에는 강한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에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 삶에 언제 문제가 생깁니까? 가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책임감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쫓아가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성숙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책임도 다해야 합니다. 직분을 받으면 그 직분에 대한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시려고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계산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했다면 우리는 다 망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 주님의 사람이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종류의 삶을 보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 더 가까운 친척이면서도 기업 무르기를 포기한 아무개라는 사람과 먼 친척이면서도 기업 무를 권리를 사서 자기가 기업을 무르는 보아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섬기며 살기를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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