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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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6 수요예배 설교(말라기 1장 1-10절/하나님을 멸시하는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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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6-16 21:20 조회7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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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azqM2_9G3u4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하다가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았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신앙부흥 운동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잘 섬겼다. 그리고 100년 정도 시간이 흘러 말라기 선지자때 신앙이 타락하는 일이 생겼다.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신앙이 무너짐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생활이 무기력해졌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 빠졌다.

1-3절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의심하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식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자기들이 변질된 것은 모르고 하나님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리에 빠져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이 되고, 사랑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올 때가 신앙이 무너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는 증거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순종과 충성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의 동기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누가복음 7:47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다 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것을 크게 깨달은 자는 주를 위해서 크게 헌신하고 봉사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지 못하는 자는 감사도 적고, 헌신 봉사도 적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위험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열심 없이, 흐리멍텅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짜증스럽게 여기면서 마지 못해 하고 있다.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반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이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은 동생이다.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라는 것이다. 에서는 미워했다고 했는데, 에서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구원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하신 것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은 없고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다.

신명기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랑하셨나니

택하심이 사랑하신 증거이다. 택함 받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셨다. 그러나 70년 후에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도 재건하게 하셨다. 모든 것을 회복하게 하셨다. 그런데 에서는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고 하셨다.

4-5절
에돔의 후손들이 다시 쌓겠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무너뜨리겠다고 하셨다. 에서 족속은 결단코 다시 회복시키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야곱의 후손은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시고 영원히 지켜주시지만 택하지 않은 에서 족속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많은 은혜와 복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돈의 많고 적음, 건강 여부, 성공 실패 여부, 평안과 고난 여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건강을 잃을수 있고 실패할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수 있는가? 우리를 택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구원해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강하게 깨달아지면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다. 이 사랑을 붙들어라! 사랑 안에서 담대함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다.

6절
주의 이름을 멸시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다. 대표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을 앞세워 책망하신다. 제사장들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다. 
멸시하는 모습이 몇가지로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일진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공경하지 않은 것이 멸시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하다. 종도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마음 속에 하나님 공경심이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고, 귀히 여기는 이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까 믿음 생활 자체가 제대로 될 수 없다. 모든 믿음 생활이 형식적이었다.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누구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해야 한다(경외).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잘못하면 책망받고 벌받을수 있다는 마음으로 조심하면서 모든 일을 바르게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아무렇게나 잘못해놓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책망받을 것, 벌받을 것에 대한 염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만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이다. 공경하는 마음이 혹시 없어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을 잘 섬길텐데 두 마음이 다 없으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제대로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신앙 생활로 나타났다.

우리에게 다른 것이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능력이 조금 적어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수 없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두가지 마음이 다 사라지므로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

7절
그래서 더러운 떡과 흠이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라고 반문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싫어하실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더러운 떡을 하나님께서 안받으시고 싫어하실텐데, 더러운 떡을 드려놓고서는 반문한다. 잘못을 모르니 고치지도 못한다.

8절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것은 율법으로 금한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했다.

레위기 22:19-20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러운 떡과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온전한 것이 없어서 이런 것을 드렸나? 아니다.

말라기 1:14 짐승 떼 가운데 온전한 제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드리지 않고, 흠 있는 것만 골라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왜 이런 것을 드렸을까? 흠 있는 것들은 가지고 있어도 별로 써먹을 데가 없다. 팔아도 값이 나가지 않는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흉내는 내고 자기는 손해를 안보겠다는 것이다.

8절에 "희생제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희생이라는 것은 가치가 있고, 값 나가고, 귀한 것을 바쳐드리는 것이다. 내가 손해보면서 아까운 것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값 나가지 않는 것, 팔아도 별로 유익이 없는 것은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예배를 참여하면 큰 희생을 하는 것이다. 바쁜 일 제쳐두고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희생이다. 그런데 아무 할일도 없고 낮잠 자다가 교회나 가볼까 해서 왔다면 희생인가? 같은 예배를 드려도 희생인 것이 있고, 희생이 아닌 것이 있다.
살찐 1년된 흠없는 수컷을 드리는 것이 희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 없는 제사를 드렸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를 멸시하는구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사람에게 줘도 기뻐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다.
희생, 손해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시지 않는다.

9-10절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최상의 것을 받기를 원하신다.
11절에 이방인 중에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여김을 받으시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니 차라리 이방인들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13절
제사를 번거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코웃음을 쳤다고 했다. 훔진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와서 봉헌물이라고 바쳤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귀한 것이라야 하나님도 귀하게 여겨주신다. 내게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수 있어야 하겠다.
일주일 중 첫날 주일, 하루 중 첫 시간 새벽시간을 하나님께 드릴수 있어야 하겠다.
소득의 10분의 1,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다.
일년된 흠없는 수컷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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