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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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5장 27-39절/죄인을 부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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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9-08 21:28 조회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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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SrLWzx7yoLM

27절
예수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레위를 마태복음 9:9에서는 마태라고 소개한다. 레위는 예수님을 믿기 전의 이름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 마태로 이름을 바꾼 것 같다. 베드로도 전에는 이름이 시몬이었고, 도마도 전에는 이름이 디두모였다.
레위는 세금을 걷는 관리로서 세관에 앉아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려 고기 잡다가 부름을 받았고, 다윗은 양치는 일을 하다가 부름을 받았다. 성실히 자기 일에 충성하는 자들을 불러서 일꾼으로 삼으셨다.
당시 세리는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착복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를 피를 빨아 먹는 잔인한 자들로 여겼고, 세리와 창기를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다. 이런 세리 레위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것이 대단한 은혜이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
주님은 온전하고 깨끗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셨다. 만약 천사와 같이 깨끗하고 거룩한 자만 부르셨다면 우리 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허물많고 죄많은 자들인데 불러서 믿게 하시고 주의 일을 할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레위는 주님이 부르실때 즉시 따라갔다. 주저하지 않았다. 세리 일 하던 것 청산하고 주님을 따라가서 주님을 위한 일꾼이 되었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세상에 얽매이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고 따라가야 순전하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
레위는 돈 많이 벌수 있는 좋은 직장을 단번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런 결단을 내렸고 부르심을 받았을때 믿음을 썼다.

29절
레위는 예수님을 믿고 제자된 것을 굉장히 기쁘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었다. 예수님와 제자들만 몇사람 초청한 것이 아니고 자기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도 많이 부른 것 같다. 예수님은 레위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된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열자 그 잔치에 응하셨다. 거기까지는 참 잘되고 좋았다.

30절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레위 집에서 잔치가 열린 것을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함께 식사하거나 교제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31절
성도가 죄인과 어울려야 하는가,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가?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와 어울려야 되는가, 어울리지 말아야 되는가? 믿는 사람간에 서로 교제하고 어울리면 신앙의 유익이 많다. 세상 죄에 빠질 유혹을 받지 않게 되고 시험을 예방하며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오직 믿는 사람과만 어울릴수 없다. 믿지 않는 사람과 완전히 단절하고 교제하지 않을수는 없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아예 교제하는 것을 끊게 되면 전도의 기회가 생기지 않을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믿지 않는 자와 어울리다보면 잘못하다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방탕한 죄에 빠질수 있다. 가면 안될 곳에 가게 될수도 있다.
신자와 불신자가 어울리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 가서 잔치에 참여하신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즐기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끊고 살수는 없지만 그들과 어울려서 죄짓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웃으로, 직장 동료로 어울리는 것은 가능하고,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면 더 좋을 것이다. 레위가 연 잔치는 방탕하고 즐기는 잔치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잘 구분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산다. 세상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과 하나가 되어서 자꾸 죄를 지으면 안된다. 어느 선까지 어울리고,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할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믿는 생활 오래하다 보면 세상 친구는 자연히 끊어지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짓는 것을 하지 않다 보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우리에게 적용해서 이런 문제까지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답변해주셨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이시다.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고쳐서 온전케 만드시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다.
주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셔서 제자로 만드셨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 덮어두고 단지 세리의 집에서 어울리신 것만 보고 비난하고 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이와같이 영적인 치료자로, 영적인 의사로,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고 예수님이 죄인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 하시는데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는 의인이고,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기뻐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분명히 죄인이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자인데, 세리는 죄인이라고 낙인 찍고 자기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이 교만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과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 그런데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전도하면서 "우리가 다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습니다" 라고 하면 자기가 왜 죄인이냐고 따진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자리에 있었다.

33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또다른 비난을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항상 비방거리, 비난거리를 찾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그냥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창조주이신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텐데 모르니까, 이런 비방을 했다.
내용이 뭐냐면, 요한의 제자는 금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금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비난했다.
당시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을 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있었을때 금식을 자주 한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잔치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니까 경건하지 못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스가랴 8:19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하는 절기를 정해놓았다. 1년에 4번 금식하는 절기를 정하고 금식하기를 힘썼다.

34-35절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대답을 해주신다.
혼인집에 손님들이 와있는데 신랑과 함께 와있다면, 손님들로 금식하게 할수 있냐고 하셨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기쁨을 누려야 할 시간에 금식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 레위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이 신랑되시고 제자들은 신부가 되어 기쁨의 혼인 잔치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은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엉뚱한 비난을 하고 있다. 잔치날에 금식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해야 한다고 하셨다. 신랑과 함께 잔치를 할때에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성도들이 금식하는 날은 언제인가? 예수님이 멀어지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할때 회개하고 금식해야 한다. 주님을 다시 찾고 주님을 다시 만나려고 힘을 쓰고 다시금 신랑과 함께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를 힘을 써야 한다.
덧붙여 볼 것은 금식은 자랑할 것이 아니다. 신앙의 핵심도 아니다. 금식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고, 금식 하지 않는다고 믿음이 나쁜 것이 아니다. 금식할수록 더 겸손해지고 주님을 더 잘 섬겨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금식은 많이 했는지 몰라도 교만해지고, 예수님을 배척했다.
가장 위험한 것이 나같이 안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 기준이 되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셔도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고 틀릴수 있다. 기준이 내가 되면 안되고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면서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36-38절
또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하나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옷을 찢을 뿐이고 또 새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낡은 옷에 구멍이 났다고 새옷을 찢어서 낡은 옷을 기우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새옷의 천이 낡은 옷에 어울릴수 없다.
다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을 터뜨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율법의 묵은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7:6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전통, 율법 조문의 묵은대로만 해야되는 줄로 안다.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는 예수님의 복음 운동이다. 살리는 운동, 구원하는 운동이다.

이 비유의 내용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려서 새롭게 일하시고 새로운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주님이 오신 이후로 연대가 바뀌었다(주전, 주후). 새로운 은혜와 성령의 역사 가운데 새로워지는 운동을 주님께서 하고 계신데, 새로운 운동, 새로운 진리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옛날 방식만 고집하면서 율법의 묵은 것만 따라가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과거의 전통, 묵은 습관에 얽매여서 새로운 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9절
묵은 포도주, 즉 의식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만 좋다고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새생명운동, 구원운동은 좋아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자들이 되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알려준 생명운동, 살리는 운동에 동참해서 주님을 믿고 은혜 받는 사람이 되고 그같은 방법으로 믿는 일에 힘써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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