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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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3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7장 36-50절/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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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10-13 21:18 조회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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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CQY8OqKCcww

본문에 보면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청해서 식사에 초대했다. 예수님은 그 집에 가셔서 앉아 음식을 잡수시는데, 그 때 그 동네에 사는 죄지은 한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다.
38절에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많은 것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갈수 없었다.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이다.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다. 이것은 회개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하는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적신 것이다.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고 했다. 여자의 머리털은 영광의 상징이다.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예수님을 존귀히 대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었다. 발은 신체 부위 중에 더러운 부분이다. 예수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면서 발에 입맞추었다. 주님을 지극히 높이고 공경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를 온몸으로 나타낸 것이다.
향유를 부어드렸다. 향유는 값비싸고 귀한 것이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는 모습을 엿볼수 있다.
주님 뒤에 서서 울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다. 온 몸으로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드리면서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다.
이 사건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과는 다른 사건이다. 마리아는 동네에서 죄인으로 취급받지 않았고 예수님 뒤에 가서 서지도 않았고 머리털로 닦아 드린 일, 발에 입맞춘 일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귀한 일을 할때 바리새인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라고 했다.
죄많은 여인이 헌신하고 향유를 부어드릴때 바리새인은 기분 나빠하고 예수님을 의심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 많은 여인인 줄 알았으면 거부하고 말렸을텐데 가만 두고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을 보니 선지자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선생님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심하면서 판단하는 죄를 지었다. 더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을 깎아 내리고 무시하고 정죄했다.

40절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다.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직 구세주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41-42절
두 사람의 빚진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인데 오백 데나리온은 일년 반 정도의 품삯이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오십 데나리온 정도 빚을 졌다. 두 사람 모두 갚을만한 능력이 없었다. 빌려준 사람이 둘 다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둘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질문하셨다.

43절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했다. 시몬이 대답을 잘했다. 주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정상적인 분별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판단할수 있다.

44절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의 대답을 근거로 이 여인과 바리새인을 비교하시고 깨우치시고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빚진 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많이 빚졌고 다른 한 사람은 적게 빚을 졌다. 둘다 갚을만한 능력이 없었는데 탕감함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큰 빚을 진 것처럼 큰 죄를 지은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큰 죄를 지었다고 깨달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죄를 지었다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 중에는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사해주셨다. 죄인들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감사하겠는가?
주님은 똑같이 용서해주셨다. 모든 죄를 탕감해주셨다. 자기는 죄가 많다고 깨달은 사람은 크게 감사할 것이다. 죄가 조금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조금 감사할 것이다. 죄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감사할 것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와 피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 바리새인과 여기 나오는 여인이 그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주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청해서 음식을 대접했다. 그런데 자기가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별로 없다. 어쩌다가 주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고상한채하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죄인일 뿐이다. 그러면서 여인에 대해서 큰 죄인이라고, 보통 사람과 상종할수 없는 자라고 판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마음 속으로 판단하고 있다. 큰 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깎아 내렸다.
그런데 여인은 주님 뒤에 서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대접과 죄 많은 여인의 대접을 받으셨다. 그런데 이 두사람의 대접이 너무 차이가 났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고서 발 씻을 물도 대접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집에 초청할때 발 씻을 물을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다. 건조한 지역에 먼지가 많았기에 발을 씻을 물을 대접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하는 당연한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
시몬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셨다. 이 두사람의 대접의 차이가 너무나 차이가 났다.

45절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 입맞춤은 영접 인사이다. 시몬은 이런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환영의 입맞춤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발에 입맞추는 일을 했다.

46절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감람유를 붓는 것은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걷다보면 머리에 열이 많이 나는데, 체온을 식혀주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도 손님에 대한 예의였는데 시몬은 이것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에 여인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예수님께 바르게 대접을 못한 것, 정상적으로 예의를 갖춰서 섬기지 못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죄 많은 여자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여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용서 받은 것에 대해서 주님께 크게 감사하면서 헌신과 사랑과 희생을 주님께 보여드린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칭찬을 받았다.
이 여인은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다. 크게 감사하고 크게 기뻐하며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 여인은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온 동네가 알고 있는데 그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해주셨다.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에 희생하고 헌신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인정해주셨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리새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처럼 주님을 조금 사랑하고 헌신도 대접도 시시하게 한 것을 지적하셨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때 이렇게 큰 죄를 사함받은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인 것처럼 크게 감사하고 크게 헌신하고 크게 봉사해야 하겠다.
그러려면 내가 죄 많은 자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처럼 큰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그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적고 아까운 마음이 들고 계산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다윗은 죄를 짓고 나서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크게 감사하고 헌신하는 자가 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주님을 대적하고 박해하는 자였는데,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사도가 되었다.
크게 헌신하려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감격과 기쁨을 주님을 섬기며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적게 사함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많은 죄를 사함받은 자는 크게 사랑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사함받았는지 깊게 묵상하고 깨달아야 하겠다.

48절
이 여자는 동네에서 죄인으로 따돌림 당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죄인으로 몰았다. 비난받고 멸시받고 차별받았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집에 와서 예수님께 공적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선언하시고 인정해주셨다. 참으로 감사하고 복된 일이다.
천주교에서는 이 구절을 가지고 이 여인이 행한 희생과 헌신과 사랑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행위가 죄사함의 원인인 것처럼 가르친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구절을 이 여자가 예수님을 믿을때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인정해주시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고행과 행위를 강조한다. 이것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죄사함 받을때 큰 기쁨과 자유함과 평안함이 있다. 이 여인에게 있었던 눌리는 마음, 두려운 마음, 부끄러운 마음이 다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임했을 것이다. 주님께 인정받고 죄사함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49절
시몬을 위시해서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심하면서 판단했다. "속으로 말하되" 마음 속으로 이 자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라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자기가 무슨 근거로 죄를 사하느냐고 판단하고 정죄한 것이다.
자기들도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받고 은혜 받았으면 말할수 없는 기쁨을 누렸을텐데, 옆에 있는 사람이 구원받아 기쁨이 넘치는데도 바리새인과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은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구원받아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비난하고 예수님을 원수로 삼고 대적하는 일만 계속하고 있다.

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죄사함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고, 구원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
주님께서 명백하게 증거하시고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 구원과 평안을 말씀해주셨다. 둘다 주님의 선물이고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죄의 가책이 다 벗어졌다. 죄사함을 선언받았으니 자유롭고 마음에 큰 평안이 임했을 것이다.
죄인에게 용서와 평안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죄인은 용서를 받지 못하면 평안과 자유와 기쁨을 누릴수 없다.
죄는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고 기쁘지 않게 한다. 죄사함을 받아야 평안과 기쁨이 있는 것이다.
죄 많은 여자가 동네에서 차별 받다가 주님 만나 죄사함받고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도 주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이 여인과 같이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믿음 생활을 해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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