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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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9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4장 15-35절/천국 잔치에 참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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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2-09 21:09 조회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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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K7ei76oEyzk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을 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주님께서 한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 16절 이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잔치 주관자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잔치는 천국 복음 운동, 은혜의 잔치이다.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러면서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했다. 구속의 관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사람들이 할 것은 와서 먹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받고 구원받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이 잔치에 초대받는 것은 영광이요 특권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세계가 잔치 집과 같다. 즐거운 은혜의 세계이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8절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라고 했다. 특별히 세 사람의 예를 들으셨다.
첫번째 사람은 밭을 사서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밭을 살 때 미리 돌아보고 사지, 사고나서 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밭을 샀다. 그런데 그 밭을 돌아보러 나가야 돼서 잔치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혹시 미리 돌아보지 않고 밭을 샀어도 잔치 갔다와서 다음에 가도 된다. 조금 늦게 간다고 밭이 없어지지 않는다. 좋은 밭이 갑자기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밭을 핑계로 잔치에 가지 않았다. 당장 밭에 안간다고 큰일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밭을 핑계로 잔치에 가지 않았다. 물질 문제에 얽매여서 믿음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열마리)를 사서 시험해야 되기 때문에 잔치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소를 한번에 열마리를 살 정도면 상당한 부자이다. 소를 시험한다는 것도 핑계이다. 소를 살 때 이미 시험해보고 산다. 그리고 혹시 시험 못해봤어도 잔치 참석하고 난 후에 소를 시험할수도 있다. 그렇게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소를 핑계대고 잔치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소를 많이 사고, 그것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은 사업을 많이 벌여놓고 얽매여서 믿는 일을 못하는 것이다. 사업을 많이 벌여놓으면 거기 신경 쓰느라고 믿는 일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번째 사람은 장가 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장가 들었다고 잔치에 못갈까? 구약 율법에 장가든 사람은 일년간 군대에 보내지 말라고 했다. 잔치는 이것과 상관없다. 잔치 다녀온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장가 들었다고 핑계 대면서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인정에 매여서, 사람들에게 끌려다녀서 믿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세가지 예만 들으셨는데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초청을 받았고, 다른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질 문제, 사업 문제, 인정 문제 때문에 믿는 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 위해서 천국 잔치를 배설해주신 것이다. 이런 잔치는 참여해야 은혜와 복이 된다. 그런데 거절하지 말아야 할 잔치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저 준다고 해서 시시하게 생각한 것인지,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참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정말 나에게 중요한 일은 열일 제쳐두고 간다. 바쁜 일이 있어도 제쳐둔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부모를 부르면 일하다가도 대부분 간다. 학원에서 중요한 수업이 있다고 하면 제쳐두고 데려다 준다. 그런데 왜 이 잔치는 가지 않았을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돈 버는 문제, 사업 문제, 가족 문제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댄다. 정말 어려운 사정 때문에 못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는 이 비유와 같이 핑계를 댄다. 하나님의 초청을 무시하고 은혜의 잔치에 가지 않는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했다. 전부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집 주인이 노했다. 주인이 알았다 하고 지나가지 않고, 됐다고 인정하지 않고 노하셨다. 주인이 노한 것이면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면 안된다. 주인은 초청했는데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진노하시고 그들에게 더이상 연연하지 않으신다. 그냥 놔두고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첫번째 초청받은 사람들은 형편이 낫고 잘사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두번째는 어렵고 힘든 자들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22절
이 사람들은 초청을 받고 다 왔다. 그런데도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무튼 처음에 초청받은 부유한 사람들(유대인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표적과 다른 표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하고 불편하고 불쌍한 자들을 부르셨다.
주님은 오늘날도 천국잔치를 배설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일에 응해야 한다. 먼저 믿음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은혜와 복받는 길이다. 세상 일을 핑계대고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3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강권은 강제적으로 끌고 오라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의미이다. 한번 사양하고 거부해도 놔두지 말고 끈질기게 초청하고 설득해서 마침내 은혜의 잔치에 나올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와같이해서 하나님은 잔치에 참여하게 하신다.

15절의 말씀처럼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라고 했다. 특별한 사람들만 이 은혜의 복을 받을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거절하여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25-33절은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이다.
중요한 두 단어가 있다. "무리"(25절)와 "제자"(26-27절)이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과 함께 길을 간다. 주님께서 그들을 돌이켜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무리과 제자는 다르다. 무리는 수가 많다. 주님은 따르는 모든 무리를 다 제자되게 하려고 애쓰시지 않는다. 제자는 확실하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소명감이 있고,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명에 붙들려서 사는 사람이다. "나는 주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라는 소명이 있다.
무리에게는 직접적인 부름이 없고, 책임감, 사명감이 없다. 호기심으로, 주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능력을 베푸시니까 무리지어서 따라가다가 흥미가 떨어지고 이익이 없으면 다 떠나버린다.
제자는 분명하게 부름받은 확신과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6)
미워한다는 말을 잘 해석해야 한다. 주님을 따라갈 때 장애가 되고, 훼방할 때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에게 지지 말고, 붙들려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안된다. 사명감을 갖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반대할수 있다. 그때 이것을 초월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수 있다.
확실하게 부름받은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할수 있는 각오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제자의 길을 갈수 있고 진정한 제자가 될수 있다.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나는 주님께 부름받은 사람이다" 라는 확실한 소명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잠깐 넘어질수는 있지만 반드시 일어나서 제자의 길을 간다. 베드로도 잠깐 실수했지만 회개하고 일어나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십자가 지시는 것이 방해될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일에 방해될 때에는 다 제쳐두셨다. 베드로가 방해할 때에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사명 감당, 믿음 지키는 길을 끝까지 가셨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간다. 선생님이 하는대로 본받아서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무리는 가기 쉽고, 많은 사람이 이익이 있으면 따라가다가 손해가 나면 다 떠나버린다.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 십자가 지는 것은 죽는 것을 가리킨다. 죽을 각오를 하고, 희생을 각오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런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다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버리라고 하면 버릴수 있어야 한다. 이런 각오와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진짜 제자가 될수 있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제자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제자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시고 두가지 예를 들으신다.

28-30절에 망대 세우는 것에 대해서 예를 들으신다. 망대를 세울 때 준공하기까지의 비용을 미리 계산해야 한다. 무조건 크게만 지으려고 했다가 중단되면 큰 낭패이고, 보는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는 길도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살기를 결심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따라가야 한다.
처음부터 잘 판단해야 한다. "나는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고난을 참을수 있겠는가? 주님이 버리라고 하면 버릴수 있겠는가?" 그런 각오와 결심이 서면 제자가 되는 것이고, 못하겠다고 하면 망대를 쌓지 못하는 것이다.

두번째 비유는 31절에 나와있다. 어떤 임금이 다른 나라와 싸울때 전쟁해서 이길수 있겠는가 를 계산해 봐야 한다. 2차 대전때 일본이 미국에게 덤볐다가 졌다.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따라가다보면 평안하고 유익이 생길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처럼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당할수도 있다. 그런 고난과 시험을 감당할수 있겠는지 계산을 해봐야 한다. 감당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싸우지 말고 화해해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갈수 있겠는가? 부모, 형제, 자매, 가족들을 믿음을 극복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미워하면서 따라가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34-35절은 맛잃은 소금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소금의 용도는 짠맛을 내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맛이 나야 한다. 성도가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 쓸수 있겠는가? 믿음을 잃어버리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데가 없다. 진정한 제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신령한 귀를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의 맛을 낼수 있어야 한다. 죄를 막고 썩는 것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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