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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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6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5장 11-32절/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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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2-16 20:47 조회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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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JqPdQh-tZuc

탕자의 비유이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분깃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이 며칠 후에 재물을 다 모아서 먼 나라로 간다. 이 아들은 아버지 없이 살아보려는 마음을 먹었다.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누구의 간섭,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것은 참 위험하고 교만한 생각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둘째 아들은 죄인인 우리를 비유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고 방탕한 삶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재산을 다 모아서 먼 나라로 갔다. 아버지와 상관없는 곳으로 가서 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실패와 죄악의 길로 가게 된다. 그는 점점 방탕해지고 죄악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죄의 근본을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씀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두 가지 악, 죄에 대해서 말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것이 죄 중에 가장 기본적인 죄이다.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인데, 거기에서 물을 길어 마시려고 한다. 하나님 떠나 다른 곳에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고 애쓰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씀한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19)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악이요 고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죄이고 불행해지는 길이다.

이처럼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는데, 먼 나라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 15:13)

허랑방탕했다. 방탕은 기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규범과 도덕과 양심 없이 무절제한 생활이다. 그렇게 살고 싶어서 아버지를 떠난 것이다. 아버지를 떠나자마자 방탕하기 시작한다. 돈 다 잃고, 건강 잃고, 인생을 다 잃기까지 허랑방탕한 길을 간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4)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죄는 적당히 지을수 없다. 조금 짓고 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즐기자고 했다가 망한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 재미보려고, 방탕생활 해보려고 하는 것인데 한번 그 길로 들어서면 끝까지 가게 된다.
지옥을 무저갱이라고 한다. 끝이 없이 떨어지게 된다. 방탕의 길이 그와 같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 5:6)
향락에 빠져 지내는 것은 죽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믿음이 다 죽고 정신이 다 죽었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노름, 마약, 방탕하는 삶을 보면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방탕이 무섭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이루어서 큰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그것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다 낭비했다. 먹어 치우고 없애 버렸다. 돈만 낭비한 것이 아니고 시간과 젊음과 인생 전체를 낭비했다. 탕자는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즐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잘 썼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낭비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무엇이 낭비이고, 무엇이 유익하고 복 받는 삶인지 알아야 한다. 불신자들은 교회 가는 것을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고 헌금하면 물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큰 손해라고 여긴다.
반면에 술마시고 노름하고 방탕하면서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너무 다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올바른 가치관을 얻게 된다. 무엇이 진정 나를 위하는 것이고, 영원히 남는 것이고, 영원한 복이 되는지 알게 된다. 이것을 깨다는 것이 복이고 바른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다.
처음에 탕자가 먼 나라로 갈때에는 꿈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허랑방탕하고 재산을 낭비하고 죄를 지을뿐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0)
완전히 죄 짓는 일에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운 삶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없애버린 후에 궁핍하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힘들어졌을 것이다. 더욱이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14절). 있던 돈도 다 떨어졌는데 흉년까지 드니까 굉장히 궁핍해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웠다. 자기 돈이 떨어졌어도 풍년이 들어서 다른 사람이 다 살면 여기 저기 가서 얻어 먹을수 있지만 흉년이 들어서 그런 기회 조차도 없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5)
한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한다. 그런데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했다. 탕자는 유대인인데, 유대인이 돼지를 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겼기에 돼지를 치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그런데 돼지 우리 옆에서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많이 먹고 배를 부르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 조차 주는 자가 없었다. 굉장히 비참하고 불쌍하게 되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7)
그가 스스로 돌이켰다. 제정신이 들은 것이다. 처음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을 때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별력도 없고 마음이 다 빼앗겨서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재산을 다 잃고 흉년 들어서 심히 궁핍해지고 돼지 우리 곁에서 배가 고플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사람들은 꼭 겪어봐야 깨닫는 경우가 있다. 말씀해주면 잘 못알아듣는다.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아무리 말해주어도 못알아듣는다.
그런데 탕자는 이렇게 겪으면서 깨달았다. '아버지 떠난 것이 옳지 않구나.. 허랑방탕이 죄구나' 이렇게 깨닫기 까지 얼마나 많은 수업료를 지불했나? 재산과 시간 다 잃고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이런 어려움 겪지 않아도 될 뻔 했다. 유익하고 가치있고 복된 생활을 할수 있었는데, 깨닫지 못해서 그런 길을 걸어갔다.
이제라도 깨닫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 이렇게 실패하고도 못깨닫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계속 죄악의 길, 방탕의 길, 악한 길로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 원망하고 신세 한탄하면서 그 길로 간다.
깨달아야 돌이키고 회개하고 바로 설수 있다. 자신이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남이 말해주면 바로 서기가 쉽지 않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늘 깨달아야 하겠다. 깨닫고 믿음 지키고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탕자는 돼지 우리 곁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을 돌아보았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다. 성경 말씀을 거울 삼아 자신을 돌아보고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
탕자에게 흉년이 참 고생스럽고 힘든 길이었지만 자신을 깨닫고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실패와 고난이 없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방탕하고 나쁜 길로만 갔을 수 있다. 그렇게 됐더라면 얼마나 더 죄를 많이 지었겠나? 그런데 흉년을 통해서 깨닫고 돌아온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7)
아버지 집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데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왜 먹을 것도 못먹고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가? 아버지 집에 살때가 참 행복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섬을 떠나봐야 섬이 보인다. 우리나라를 떠나보면 우리나라가 잘 보인다. 지구를 떠나보면 지구가 잘 보인다. 집에 살 때에는 집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집이 얼마나 좋은 안식처인지 모른다. 집 떠나 고생해봐야 철이 들고 집이 좋다는 것을 생각한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 다닐 때에는 교회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고 교회 나오지 않고 방황하고 죄 많이 짓다가 나중에 돌아다보면 교회가 참 좋은 곳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다. 바벨론 강가에서 찬송하면서 그때가 참 좋았는데 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에 있을 때에는 예배를 힘들어하고 우상숭배했었는데, 좋은 환경 다 빼앗기고 돌이켜보니 그때가 참 좋았었는데..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난 다음에 후회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있을 때 믿음 생활 잘 해야 한다. 기회 주실 때 하나님 잘 섬기고 믿음 생활 잘 하면서 은혜와 복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겠다.

18-19절
탕자의 생각이다. 돼지 우리 옆에서 한 생각이다.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냄새나는 돼지 옆에서 아버지 집을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지극히 낮아지고 겸손해졌다.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마음을 가졌다. 종으로 받아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품꾼으로 살기만 해도 배불리 먹을수 있다. 굶주리지는 않는다.
아버지 집에 얼마나 좋은 것인가 비로소 깨달았다.

20절
탕자는 생각만 하지 않고, 그리워만 하지 않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에 그치고 만다. 마음만 먹다가 끝나는 사람이 있다. 일어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한걸음이 중요하다. 한걸음이 인생의 삶을 바꾼다.
탕자는 이전에 좋아했던 것 다 뒤로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미련과 애착을 다 끊고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가 은혜와 복을 받는다.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려면 이전에 좋아하던 것 다 끊어버려야 한다.

아버지의 모습 네가지가 나온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 집까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 보았다. 이것은 늘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기다리지 않았다면 문 두드릴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한 모습만으로도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 달려 나갔다. 이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를 보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보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갔다. 아버지는 탕자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방탕하고 창기들과 즐기는 것을 다 알았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굶주리고 돼지 우리 곁에서 눈물 짓는 것을 다 지켜 보았을 것이다.
세상 아버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항상 보고 계신다. 죄악에 빠져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을 다 지켜 보신다. 그리고 일어서서 돌아오려고 하는 모습도 보고 계신다.

"측은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 당당하던 아들이 어깨가 쭉 쳐져서 터덜터덜 걸어올 때 애석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그런 아들을 맞이했다.
탕자도 집을 떠난 고생하고 힘든 생활을 겪었지만 아버지도 아들을 떠나 보내고 걱정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에게 달려가서 냄새 나고 추한 아들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뜨겁게 사랑하며 용납했다.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과거를 꾸짖지 않고 돌아온 것으로 용서하고 받아주신다. 참으로 너그럽고 감사한 모습이다.

22-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지시한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한다. 더러운 옷 다 벗기고 깨끗하고 값비싼 옷을 입혔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갈아 입힌 것이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서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 주었다. 가락지는 언약의 상징이다.
신발을 신겼다. 맨발로 온 것 같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오랫동안 굶주리고 배가 고팠을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마음 껏 먹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돌아온 죄인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오기만 하면 맞이해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해주실 것이다.
아들은 크게 기뻐하고 아버지는 더 기뻐했다. 집안의 모든 가족과 종들도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25-32절
큰 아들의 반응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잘한 것만 생각하고 교만했고 물질을 아까워하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 받고 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잘 가르쳐서 늘 하나님 품 안에서 믿음으로 살수 있도록 교훈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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