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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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9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7장 5-19절/살아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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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3-09 21:09 조회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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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rKGHlLWxgW4


5절

사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깨닫고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라도 믿음이 더 좋아지기를 소망할 것이다. 이 요청에 대해서 주님의 대답하셨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 우리의 믿음이 작고 연약한 줄 알고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 교만한 것이고 반드시 타락하게 된다. 부족한줄 알아야 열심을 내게 되어 있다. 사도들까지도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는 더욱 장성한 믿음을 갖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이다. 겨우 눈에 보일만큼 아주 작은 씨인데,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씨이다. 겨자씨를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 열매도 맺힌다. 이와같이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한 것은 작더라도 생명있는 믿음은 자라나고 역사하는 믿음이 될 것을 말씀한 것이다.

얼마나 오래 믿었는가? 직분이 무엇인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 있는가? 이다.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자란다. 그러나 살아있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큰 바위 덩어리는 시간이 아무리 가도 그대로 있다. 그러나 겨자씨는 비록 작을지라도 속에 생명이 있어서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난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가? 살아있으면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일 수 있다. 죽지 않았는가 돌아봐야 한다.

진짜 생명 있는 산 믿음은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참 믿음의 특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어야 바른 믿음이다. 우상,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으면 우상숭배이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과 상관없는 것은 참 믿음이 될 수 없다. 그냥 믿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될 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은 자라나고 역사하게 되어 있다. 비록 지금 작을지라도 반드시 성장하게 된다.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는 뿌리가 아주 깊다. 뿌리 뽑기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가능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능히 이룰 수 있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지면 뽕나무 뿌리를 뽑는 것처럼 우리 속의 못된 습관, 죄악의 뿌리도 뽑을 수 있다.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역사를 이룰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 주의할 것은 아무거나 보면서 이루어질지어다! 믿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어려운 일도 이루어진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지처럼 건너고 애굽 군대는 다 물에 빠져 죽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돌았다. 그리고 칠일째 일곱바퀴를 돌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여호수아가 연구해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와같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지금 비록 작을지라도 생명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아무리 커보여도 생명력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비록 작아보일지라도 살아있는 믿음이라야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7-10절

충성된 종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지금은 종이 없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우리 생활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2천년 전 실제 종이 있었던 시대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들어야 한다.

보통 종은 밭에 가서 일하거나 양 치는 일을 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종에게 고생했다, 쉬어라, 앉아서 밥 먹으라고 말할 주인은 없다. 집에 오면 또 할 일이 있다. 주인을 위해 음식을 차리고 청소를 해야 한다. 주인이 다 먹고 나면 그 다음에 종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이시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종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낮고 천한 종의 위치에 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면 착한 종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아달라고 한다든지, 상을 달라고 한다든지 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명령대로 수고했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고 대접받으려고 하면 안된다.

우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왜 대접받으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가?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섭섭하고 시험에 들게 된다. 언제나 나는 종이다 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해서 상받거나 칭찬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종의 자세는 열심히 일하고 밖에서도 일하고 집안에서도 일하고 충성만 해야 한다. 이것이 종의 책임과 사명이다.

물론 자비롭고 선한 주인은 종에게 잘 대해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종은 종으로 부리지, 종을 아들처럼 대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참 좋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알아주시고 인정해주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러나 종으로서 가져야 되는 자세는 언제나 바르게 가져야 한다. 주인이 잘 해주는 것은 주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이기 때문에 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될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지녀야 한다.

일을 성공적으로 잘하지 못하면 꾸중을 듣고 책망을 받게 된다. 일을 잘하고 성공적으로 잘 마치면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될 일을 한 것 뿐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우리는 무익한 종이다.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될 마음의 자세이다. 일꾼이 지녀야 될 태도이다. 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영광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중심이 없으면 일하다가 낙심하고 시험들고 원망할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충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11-18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침 그 마을에 나병 환자 열명이 예수님에게 멀리 서서 소리 지른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것을 들은 것 같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은 불치병이다. 하늘에서 내린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죽게 되는 병이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추방되고 나병환자들끼리 따로 모여 지내게 된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자기들 옆에 지나가게 되면 "부정하다"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했다.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병이다. 우리의 죄를 상징하는 병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열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4)

언뜻 보면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율법에 의하면 피부에 나병의 증세가 보이면 제사장을 찾아가서 진단받게 했다. 나병으로 진단되면 진 밖으로 나가서 지내야 한다. 나병에서 나았을 때에도 제사장에게 진단받아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은 고쳐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다.

그런데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걸어가는 중간에, 아직 제사장에게까지 가지 않았는데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다가 주님의 은혜로 나병이 나았다. 굉장한 역사와 은혜이다.

순종하다가 저주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는가! 서로 얼굴을 만져보고 손을 만져보고 끌어 안고 울부짖고 소리지르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로 가고, 제사장을 만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열 사람이 다 예수님께 소리를 질렀고, 열 사람이 다 주님 말씀 순종하고 가다가 고침을 받았는데 아홉 사람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17~18)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셨다. 상당히 섭섭한 마음을 담아서 말씀하셨다. 아쉬워하고 허탈감에 빠진 심정을 보이셨다. 열사람이 다 돌아와서 감사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나?

처음에 부르짖던 사람은 열사람인데, 감사하는 사람은 왜 한 사람 뿐인가? 고쳐달라고 소리치던 자들은 어디 갔느냐?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한 사람들 다 어디 갔는가?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고침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다 어디 갔는가? 

아홉 사람들도 주님께 찾아왔고, 병 고침을 받고, 은혜을 받고 능력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참으로 아쉬워하셨다. 섭섭하게 생각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이런 상태였다면, 죽을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서 감사했을텐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나병보다 더 심한 죄인들이었다. 죄값으로 지옥에서 멸망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의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받았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된다. 아홉 사람은 병고침 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구원받고, 은혜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도응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 우리도 그럴 때가 많다. 어려울 때에는 부르짖고, 기도하고, 주님을 찾다가 은혜 받고 해결되면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돌아와서 감사한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다. 병고침은 열사람이 다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돌아가버린 아홉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구원받지 못하면 병고침 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돌아와서 감사한 한 사람은 병고침받는 은혜도 누렸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주님은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큰 은혜를 주신다.

그냥 가버렸던 아홉 사람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불치병에서 고침 받았는데 감사의 마음이 없었겠나? 그런데 돌아와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마음으로만 감사했다.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감사는 꼭 표시해야 한다. 표현해야 감사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셨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꼭 시인하라! 감사 헌금을 드리라! 아무리 감사하는 마음이 많아도 표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홉은 어디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살면서 감사할 일이 훨씬 많다. 어렵고 힘든 일, 불평할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훨씬 많다. 그런데 그 많은 감사할 거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루 더 사는 것, 잘 먹는 것, 건강 누리는 것, 구원 받은 것을 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잃어버린 다음에서야 조금 아쉬워한다. 그런 형편에 머물러서는 안되겠다.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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