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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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4 주일오전예배 설교(요한복음 21장 15-22절/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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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4-24 15:04 조회4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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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pTugu_Guviw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 밤새 지치고 피곤해진 제자들에게 생선과 떡을 먹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빌라도나 헤롯왕이나 대제사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보면 비교급을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더”를 강조하셨습니다. 더 사랑하느냐, 더 많이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입니다. 또 이 질문은 이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입니다. 네 가족보다, 네 이웃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옛날 같으면 자신만만하게 “그렇고 말고요, 이 사람들보다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큰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6절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더”라는 조건을 붙이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똑같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7절에 보면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진실하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음에도 주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근심하였습니다. 주님은 왜 세 번씩 사랑하느냐고 물었을까요?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베드로를 사랑하여 그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나를 제자로 받아주실까? 나 같은 것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상처를 씻어주시려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는 이 죄의식을 치료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세 번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나의 과거를 아시고 미래도 아시는 주님, 나의 실수와 허물을 아시는 주님, 내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이 세 번의 고백으로 주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 믿음에 섭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베드로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됩니다. 

우리 중에는 베드로처럼 세상에 나가 살면서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예수님 욕하고 비난하며 죄를 지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방탕과 탈선의 길로 가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의 고백이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고 여러분을 회복시키고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그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양입니다. 주님의 목숨만큼 귀한 양입니다. 그 양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맡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양을 사랑하는 것이고, 양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는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1:22-23에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가까이하면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교회에 헌금하면 주님께 하는 것이고, 교회를 위해서 눈물 흘리면 주님을 위해서 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만들어 믿음을 회복시켜주시고 주님의 양을 치는 목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 믿는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일군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박해를 받으며 기뻐합니다. 사랑이 만들어 낸 능력입니다. 


2.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께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19절 끝에 “나를 따르라” 했고, 22절 끝에 “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3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뵙던 날, 주님께서는 그날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은 물론이고 부친까지 버려둔 채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님 따르는 일을 중단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욕심과 고집과 자기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잘못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 대항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였고,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제자들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어느 때보다 주님 옆에 있어야 할 시간에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디베랴 바다에 가서 밤새도록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지금, 복음서의 마지막 장에서 “나를 따르라”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무슨 뜻입니까? 주님 따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원대로 살 수 없고, 내 생각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남들에게 끌려다니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킴이라” 베드로가 후에 원치 않는 곳으로 잡혀가서 순교를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베드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생각대로 살고, 자기 원하는 대로 다녔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잘난 척했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달라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믿음이 자라서 성숙해진 후에는 그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는 내 맘대로 하고 싶습니다. 어릴 때는 내 맘대로 합니다. 그러나 철들면 부모님 마음도 헤아리고, 가족도 생각하고, 집안 사정도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띠 띠우고 데려가는 곳으로 갑니다. 내 욕망을 따라 움직이면 안 됩니다. 참 신앙의 길은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고난받는 곳까지, 순교하는 자리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말씀에 붙들려 따라가는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끌려가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살면 사람들이 핍박하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기도 할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끝까지 로마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지키다가 순교합니다.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것이 진정한 복이고 성공입니다. 주님을 참되이 따를 때만 나의 삶이 참되고 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끌려다니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짜 따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권세입니까?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다니고 있습니까?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붙들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다’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면 우리가 행복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음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9절 끝에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베드로 인생의 마지막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면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삶의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길, 손해 보는 길, 힘들고 괴로운 길이라도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바른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면 성공할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편한 길, 빠른 길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는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한 길, 좋은 길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가장 바른 길이고, 가장 복된 길입니다. 빠른 길보다 바른길을 찾아야 합니다. 


3. 네게 무슨 상관이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 따라가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데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씁니다. 20-21에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옆에 있는 요한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만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베드로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오래 살게 하든지 일찍 죽게 하든지, 고난을 받게 하든지 평탄하게 살게 하든지,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사람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죽어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100살 가까이 살면서 늦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기술과 재능으로 봉사하고, 어떤 사람은 아이들 돌보는 것으로 섬기게 하십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맡겨주신 일이 나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는 생각지 아니하고 항상 옆 사람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가장 복 받을 인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일 하면서 제일 큰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꾸만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할 일 못 하고, 남에게 신경 쓰느라고 자기 갈 길 못갑니다. 베드로전서 2:23에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묵묵히 자신이 가야할 길만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욕하든지 위협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런 것은 하나님께 다 맡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만 가시고 해야 할 일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는 세월을 허송하게 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다가는 탈선하고 방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무엇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묵묵히 주님만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상급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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