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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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 주일오전예배 설교(창세기 38장 1-11절/유다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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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8-07 15:41 조회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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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rsv0q-nR0wY


창세기를 보면 족장들의 신앙과 삶을 차례대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한 내용이 차례로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요셉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38장을 보면 갑자기 유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빠뜨릴 수 없어서 중간에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본문은 너무 추하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불륜이 일어나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추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죄를 짓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떠난 사람은 인간의 생각대로 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므로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유다의 실수

1절에 “그 후에”는 말로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를 말합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할 때 유다는 죽이지 말고 팔자고 주장합니다. 어떻게든지 요셉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팔자고 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은 20개를 받고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심히 슬퍼합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오래도록 슬퍼했습니다. 아들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곤란해집니다. 난감했을 것입니다. 형제들끼리도 불편했을 것이고 서로를 대하기가 어색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그런 상황이 견딜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납니다. 1절을 보면 유다는 그런 형제들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둘람이라는 이방지역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큰 실수였습니다.

유다의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정이었습니다. 당시 야곱은 제사장이며 동시에 선지자 역할도 했습니다. 유다의 가정은 교회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축복을 받으며 사는 가정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을 떠난 것은 교회를 떠난 것과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나름대로 큰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물려받은 재산도 있겠다 남은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 맘대로 멋지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허랑방탕하며 죄만 지었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 다 잃고 결국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죄를 짓는 경우가 있고, 때로 성도들 사이에도 갈등이나 시기와 질투도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도 일어나고 실망스러운 일도 생깁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실망해서 믿음을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유다와 같은 일이 생깁니다. 유다가 살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계승하는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이 있습니다. 유다는 그런 가정을 떠났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떠나고 믿음의 형제들이 있는 곳을 떠나고, 하나님의 약속한 땅을 떠나, 이방 나라로 가서 자기 맘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2절을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형제들을 떠난 유다는 결국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합니다.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오는 신앙의 전통이고, 모세 때는 율법으로 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유다가 형제를 떠난 것도 잘못이지만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은 더 큰 실수입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에게서 아들 셋을 낳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입니다. 6절을 보면 유다의 장자 ‘엘’이 자라서 아내를 데려왔는데 그 여자의 이름은 ‘다말’입니다. 이 다말 역시 이방 여자로서 블레셋 땅 딤나 지방에 사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유다의 가정은 믿음 없는 가정이 되었고, 세속적인 가정이 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였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죽인 것을 보면 엄청난 큰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 중요한 말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10절에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루하루 사역을 마치고는 “여호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보기에”가 아닙니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좋아야 진짜 좋은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아이들을 믿음으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하나님께 벌 받아 죽을 만큼 악했습니다. 유다가 믿음의 가정을 떠날 때, 그는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잃어버렸습니다. 

8절을 보면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 다말에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들어가라는 말은 결혼하라는 뜻입니다. 장자 엘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둘째 오난에게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의 대를 이어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악한 행동을 합니다(9-10절). 오난은 아버지의 명대로 형수에게 들어가기는 했으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땅에 설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심히 악한 일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오난도 죽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계대계승법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다가 죽었습니다. 

계대계승법은 기업을 무르는 법과 함께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만 있는 아주 특별한 법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예고하는 아주 중요한 법입니다. 아담 하와의 죄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영생을 잃고, 에덴동산도 잃고,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축복을 다 잃었습니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기업 무르는 자가 되시고, 생명의 대가 끊긴 사람에게 대를 이어주고, 소망이 끊긴 사람에게 그 소망을 이어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살게 되고, 예수님만 믿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찾게 되고, 잃어버린 낙원, 천국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계대계승법과 기업 무르는 법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1절 보면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가 자란 후에 다시 혼인시켜주겠다고 말하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과부로 지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며느리 다말 때문에 자기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 결혼시키면 그 아들도 죽을까 봐 염려한 것입니다. 


3. 다말의 계획(12-30절)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자기 아내마저 잃습니다(12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추스르고 난 후 유다는 양털 깎는 일군들이 있는 딤나로 갔습니다. 딤나는 며느리 다말의 고향입니다. 이때 친정에 가 있던 다말에게 시아버지가 딤나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말은 황당한 일을 계획합니다. 14절을 보면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에나임 문에 앉아서 시아버지를 기다립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것은 셀라가 장성했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 길로 지나가다가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떠난 유다는 이렇게 깊은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삶의 기준도 잃어버리고, 윤리와 도덕도 잃어버리고, 점점 타락합니다.

유다는 그 창녀가 며느리인 줄 모르고 흥정을 합니다. 다말은 담보물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 세 가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도장”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지팡이”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꽃, 과일, 새, 짐승 등을 새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조각물을 보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음란한 여자는 아닙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에게 접근한 것은 정욕이나, 쾌락이나,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말은 남편이 죽은 후 그때까지 정조를 지키며 살았고, 이후에 다른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습니다. 다말은 아들을 낳아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의 이런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24절을 보면 석 달쯤 지나서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격분했습니다. 

며느리를 끌어내 불살라 죽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는 아무도 모르게 감추려고 하고, 며느리의 죄에 대해서는 참으로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벌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요셉이 그것을 알았을 때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요셉을 의로운 자라고 말합니다. 25절에 보면 다말이 끌려갈 때, 시아버지에게서 받은 물건을 보여주면서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말했습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26절). 며느리가 죄를 지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기가 죄인이었습니다. 불태워 죽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도 살아오면서 내가 잘못하고 남에게 화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분노할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악행을 보면서 화를 내고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면 더 크게 분노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한 죄인입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유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나고 믿음의 형제들을 떠나서 잘 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지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은혜(27-30절) 

드디어 다말이 쌍둥이를 해산하였는데 먼저 나온 아이를 "베레스”라 하고, 다음에 나온 아이를 "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이 ‘베레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서 이 유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부도덕한 여자 다말의 이름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마태복음 1:3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와 다말과 베레스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부도덕하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악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유다와 같은 자들이고 다말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보다 강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번 택한 백성은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유다 같은 사람을 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다말 같은 사람을 예수님의 조상으로 삼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유다가 집을 떠나 방탕생활 한 것이 잘했다는 것 아닙디다. 다말이 한 일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무슨 죄를 지도 다 용서 해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이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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