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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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30 수요예배 설교(고린도전서 14장 1-25절/예언과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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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11-30 21:55 조회3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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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iTiS6cRMfXo

1. 성도는 예언을 사모하고 구할 것(1)
2. 방언하는 자와 예언하는 자(2-4)
3. 방언이 무익한 이유(5-25)

1절
"사랑을 추구하며" 바울은 성도가 힘써 추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중단 없이, 쉬지 말고, 계속해서 추구하며 사모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신령한 것은 은사이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계시를 주셨고, 말씀을 받아서 직접 전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직접 계시가 중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서 전하는 일을 지금은 없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엡 3:5)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직접 계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주셨었는데 이제는 중지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을 한다고 하면 옳지 않다.
본문에서 말하는 예언은 성경말씀을 깨달아서 말하는 것이다(계 1:3). 예언을 하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깨달아 전하는 일을 힘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아무리 귀한 말씀도 내가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믿고 받고 전할 때 생명과 힘이 된다. 말씀을 깨달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자신의 믿음이 자라나고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건강한 영적 생활, 믿음 생활이다.

2절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몇가지 설명한다. 방언에는 세종류가 있다. 첫째, 외국어이다. 오순절 성령충만 받은 성도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복음을 전했다. 성경은 이것을 방언이라고 기록했다.
둘째,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신비한 방언이다. 이것은 영적인 방언이다.
셋째, 새방언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새 방언은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전하는 것이다.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신앙적 유익을 준다는 것이다. 권면하는 것은 교훈하고 바로 세우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경계하는 바른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위로는 박해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자에게 소망과 평안을 주는 것이다.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고 자기의 덕을 세우는데는 유익이 있을 수 있지만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끼친다. 말씀을 가르쳐서 많은 은혜를 끼치면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된다.

5절
1-4절에 방언과 예언을 비교해서 설명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고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덕을 세우지만 남들에게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 예언은 사람이 알아듣는 말이고, 사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많은 덕을 세운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바울은 방언을 강조하지 않고 예언을 강조한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0)
다 선지자가 될 수 없고, 다 사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방언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하)-25절에는 방언이 덕이 안되는 이유, 유익이 없는 이유를 길게 설명한다.

5절(하)
방언은 덕이 안된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 자체만 가지고는 덕이 안되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신앙생활에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덕을 세우지 못하면 해를 끼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방언은 좋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6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와서 혼자 방언만 열심히 하고 갔다면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었겠나? 아무도 은혜 받지 못하고 유익이 없고 도움될만한 일이 없다. 바울이 교회에서 말씀을 잘 가르쳐었기 때문에 온 성도가 힘을 얻고 교훈을 얻고 죄를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과 유익이 있는 것이다.

7절
방언은 분별을 할 수 없다. 비유를 들었다.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할 때 악기가 제각각 독특한 소리와 음을 내기에 분별을 한다. 그런데 명확하게 소리를 내지 않아서 피리 소리인지, 거문고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 외면당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소리를 많이 내도 쓸모가 없다. 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소리를 내야 한다. 방언은 명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없다. 뭔가 말하지만 뜻을 알수 없다.

8절
예전에는 나팔 가지고 전쟁에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했다. 전진, 후퇴, 돌격, 취침, 기상 등을 신호했다. 그런데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듣는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전진하라는 것인지 후퇴하라는 것인지 일어나라는 것인지 잠자라는 것인지 명확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뜨리고 괴롭게 하는 역할만 하고 만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말씀을 전할 때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전해야 한다. 성경은 죄를 명확하게 지적한다. 헷갈리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상숭배는 죄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성경은 확실하게 말씀한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을 두리뭉실하게 희미하게 전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한 소리를 내야 뜻을 알아 듣고 준비를 하고 전쟁하며 나아갈 수 있는데 방언으로는 이런 것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9절
방언은 허공에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10-11절
방언을 하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고 이해를 하지 못하면 외국인이 되는 것과 같다. 각주에는 야만인이라고 했다. 서로 모르는 소리를 한다. 뭔가 열심히 떠드는데 하나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피차 외국인과 말하는 것과 같고, 말할 줄 모르는 야만인이 된다.

12-13절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라는 것이고, 이것을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했다. 신앙생활하면서 나의 유익만 생각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해야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덕을 세우기를 위해 힘쓰고 덕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을 해야 한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28)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뭔가?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덕을 세우는 것은 나의 유익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좋게 하고 은혜가 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29)
어떻게 덕을 세우는가?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내 말을 듣고 은혜를 받고 힘을 얻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14절
방언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 영은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깨달음도 없고 회개도 없고 죄를 떠나는 것도 없고 결심도 없는 열심이기 때문이다. 뭔가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모르는 소리를 했기 때문에 깨달아지는 것도 없고 회개도 없고 열매도 없다. 즉 유익이 전혀 없다.

15절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영으로 하고, 마음으로 해야될 것을 말씀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기도와 찬송이 된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영으로 해야 한다. 입술로만 찬송하고 기도하고 끝나면 온전한 자리에 이른 것이 아니다. 좀 더 깊어져서 영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기도 많이 하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잘 깨닫고 순종하고, 마음과 영으로 기도하는데 힘쓰라고 했다.

16-17절
방언으로 축복하거나 감사했다고 한다면 좋은 축복과 감사의 내용을 말했어도 듣는 사람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아멘을 할 수 없다. 자기는 잘했어도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다른 사람이 기도한 다음에 우리가 다 아멘으로 동참해야 한다. 아멘은 "진실로", "찬동한다"는 뜻이 있다. 대표기도를 하면 온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방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18절
바울은 외국어도 잘 했고, 또 새 방언도 많이 한 것 같다. 그래서 방언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아서 신령한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많이 했다.

19절
깨달은 마음으로 성경을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 일만 마디를 말했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면 듣는 사람은 지루할 것이다. 반대로 성경을 깨달아 다섯 마디 말만 해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유익을 얻을 것이다. 성경을 잘 깨달아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평생 방언하는 것보다 성경 한구절이라도 제대로 깨달아 지키는 것이 은혜요 복이다.

20절
고린도교인들이 교만해서 서로 시기하고 분쟁했다. 유익이 없는 방언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바울이 권면한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어린 아이는 경험이 없다. 악에는 경험이 없어서 서툰 사람처럼 모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혜에는 장성한 자가 되어 깊이 깨닫고 여러가지 분별을 잘 해야 한다.

21-22절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 반면에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 28:11)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이사야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오히려 반박하고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벌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을 때 잘 들었으면, 언어가 다른 앗수르를 데려와서 징계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텐데 듣지 않으니 다른 방언을 하는 앗수르고 징계하셨다.
반대로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여 주신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은혜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음을 지키며 신앙에 유익한 길을 갈 수 있다.

23절
온 교회가 교회에 모여서 방언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일은 하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할 것이다.

24-25절
예언은 큰 유익이 있고 효과가 있다. 온 교회가 모여서 방언만 하고 있으면 처음 믿는 사람들이 와서 미쳤다고 할텐데 예언을 하면 말씀으로 책망받고 판단받고 숨은 죄가 드러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방언에 치우쳐서 방언으로 교만해지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혹 방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도 통역하기를 기도하고 통역을 세워야 덕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도 방언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덕 세우는 것을 힘써야 한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워서 은혜와 유익을 끼쳐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중요한 표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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