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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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13장 1-13절/믿음에 서 있는 증거, 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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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6-07 21:33 조회234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o567JjSAoJ0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믿음에 서 있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책망조로 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이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복용교회 성도들이여! 믿음에 서 있는 증거를 나타내 보여라!

우리 교회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가 믿음에 서 있다는 증거를 당당히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믿음에 서 있는 증거를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배워서 당당한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라!

7-10절 온전하게 되라!

11-13절 작별 인사와 문안축복 입니다.


1절 보겠습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세 번째 방문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고린도 교회 방문은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개척할 때입니다. 

두 번째 방문은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보고 받고 그들을 책망하고 바로 잡기 위해서 방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절에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라고 했는데,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의 범죄와 타락한 것으로 인해 근심함으로 두 번째 방문했을 것으로 많은 성경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방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리니” 라고 한 것은 헬라어 원어로 “금방 갈 것이다. 내가 갈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큰 혼란과 오해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는데 바울이 직접 가서 문제를 바로 잡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을 향한 수많은 억측과 비방과 모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을 때 나온 말들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참 사도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권위와 성령의 감동이 충만했습니다. 그가 참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없을 때 바울이 사도가 아니고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고 욕심쟁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자들과 그 말에 동조한 모든 자들은 바울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은 두 세 증인의 입으로 자신에 대한 잘못된 말들에 대해서 바로 잡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성경대로 공정하게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죄에 대한 문제를 공정하게 판결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사건을 확정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라도 진실된 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려면 두 세 증인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증인이 증언하는 말이 정말 참이라면 두 세 증인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바른 증언을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고 고린도 교회를 위해 헌신했는데 정작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의 농간에 속아서 바울을 공격하고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한탄하는 연약한 육신과 죄의 부패성을 가진 한 사람입니다. 누구라도 바울과 같은 인신공격을 당하면 참고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별 말 아니어도 남들이 뒤에서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했다는 것을 듣게 되면, 속된 말로 ‘뒷담화’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그럴수도 있지.. 내가 부족한 점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이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발끈하면서 ‘니들이 감히! 나를 논해!’ 라고 혈기가 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감정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혜와 지식으로, 자기 생각대로 판결을 하지 않습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펴보고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당회와 같이 직분을 맡은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절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는 여러 가지 죄악 중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에 근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고했었습니다. 그때에는 책망하며 경고까지 했고 엄하게 치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세 번째 방문하게 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 죄 지은 자들 뿐 아니라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미리 말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범죄하여 경고받은 자들과, 그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금 죄를 짓고 있고 바울이 앞으로 방문했을 때 그 죄가 드러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하지 않겠다! 반드시 치리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미리 말하노니”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말하노니! 회개하라! 죄에서 돌이켜라! 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회들을 향해 수차례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의 목적은 너희들 심판 당할테니 벌벌 떨고 있어라! 너희는 심판 받아 망할 것이다! 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의 진정한 목적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심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회개의 기회를 주실 필요 없이 경고하지 않고 바로 심판해 버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셔도 하나님이 잘못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셔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경고와 책망과 심판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절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거짓 선생들의 미혹을 받아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너희들이 내가 사도가 아니라고 했지? 사도의 증거는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외모나 언변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  이것이 내가 사도라는 증거야! 

사도의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는가? 이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을 전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가? 성경 진리에 맞는 말을 하는가?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눈꼽이 끼고 눈에서 고름이 나고 눈이 침침해서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등도 굽고, 말주변도 별로 없는 자가 무슨 사도냐? 나 보다 외모적으로 못한 저 사람을 과연 하나님이 쓰시겠느냐?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외모적인 부분, 눈에 보이는 부분들을 공격하면서 바울 같이 한심하고 형편없는 자가 무슨 사도냐? 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선동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의 증거, 하나님의 참된 종의 증거는 그 사람이 무엇을 전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합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예수님은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모든 면에서 약해보이는 분이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나사렛 촌 동네의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우면서 지내셨던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면면도 별볼일 없었습니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는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붙잡히시고 심문당하시고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약해보이는 주님은 결코 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당당히 “다 이루었다!”고 구속 완성을 선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 자신도 자신의 약한 겉모습만 보고 사도권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자들을 향해 엄중한 권징을 행하므로 주께서 세우신 사도의 권위를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4절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주님은 실제로 약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서 약해지시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있어 산 자를 죽이시는 일은 이보다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자신을 대적하고 비방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자들을 한번에 몰살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형대행의 구속공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시므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입니다. 우리도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나의 죄악과 정욕의 부패성을 다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절 같이 읽겠습니다.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보다 먼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사도인가 아닌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도 개개인이 믿음 안에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믿음 안에 서 있지 못하다면 바울이 사도가 맞냐 아니냐? 이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믿음 안에 서 있지 못하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고, 죽어서 지옥 멸망 당해야 될 자라면 남의 일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믿음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죄를 지을 때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을 부를 때,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주의 일에 참여하며 봉사할 때 기쁘고 즐겁고 보람되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확실합니다.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렴풋하게 추상적으로 느낌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 이 확신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나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믿음이 있느냐?

그리고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믿음과 감동과 그리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해주신 은혜의 체험들을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누가 알려줘서 배워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버림 받은 자라고 겁을 주고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여 바른 믿음으로 바로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성령께서 반드시 이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아이들의 경우 순간적으로 잠시 의심이 들 수 있고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렵게 말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믿어지는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지, 말씀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는지? 이와 같이 기본적인 것부터 점검해줘서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한 후에 깊이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6절

6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자신이 믿음 안에 서 있는 것을 확증하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확신하는 자는 바울이 참 사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믿음 안에 서 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참 믿음을 가진 성도요, 주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참 사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먼저 점검해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7절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죄를 짓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사도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 지라도” 자신이 사도로 인정 받지 못하고 무시 당하고 외면 당할지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른 믿음에 서 있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조금도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내가 어떻게 되든..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 답게..거룩한 백성답게..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걸로 감사합니다!! 내가 희생해서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내가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9절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바울은 오직 진리대로만 사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는 얼마든지 약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 안에서 강해지기를,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른 믿음 위에 바로 서고,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여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주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온전한 삶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성도들이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강하고 담대한 승리의 믿음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믿음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내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위해, 맡겨주신 성도님들이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0절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후서 말미에 이렇게 강한 어조로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세우려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다시 방문할 때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면서 바른 믿음에 서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의 권위로 강하게 징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권면을 듣고 회개하고 바른 믿음에 서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11절 같이 읽겠습니다.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바울이 마지막으로 인사합니다. “형제들아!”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고 무시하고 비방한 자들을 향해서 바울이 형제들아! 라고 불렀습니다. 이 부름 속에 담겨진 바울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형제들아 기뻐하라! 왜 기뻐합니까?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주 안에서 위로를 받고, 주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하므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자의 심령 상태는 이래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구원을 받은 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리로 낮아질 때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모습으로 자라나고 주님 주시는 위로를 누리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누리는 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사는 자는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위로를 받고 주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므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서 있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때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복용교회 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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