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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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1 수요저녁예배 설교 (히브리서 9장 1-10절 / 성소) (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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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10-11 21:28 조회1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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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4XNTIlepZHI?si=Oe5wgWW2f39aRwDe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과 박해를 겪고 있었던 히브리 성도들을 위해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일부 히브리 성도들은 핍박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바른 복음, 바른 믿음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위대한 큰 대제사장이시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새언약의 대제사장이시다!" 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구약 대제사장의 연약한 면을 부각시키고, 신비로운 인물인 멜기세덱을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우리에게 구약시대 율법에 속한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영원하신 새언약의 대제사장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9장에서는 성막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왜 성막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11-12절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구약의 장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의 피로 영원하고 완전한 단번 속죄를 이뤄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막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요? 그저 옛언약에 속한 구시대의 유물로만 취급을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절 보겠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첫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첫 언약은 옛언약, 구약을 의미하고 구약에 속한 율법을 의미합니다. 옛 언약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언약을 맺어주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을 통해 주신 "섬기는 예법과 성소"의 제도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언약을 맺어주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던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크게 감격하며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소를 가리켜 “세상에 속한 성소”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악하고 더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에 속했다고 언급한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성소와 대조해서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성소와 비교할 때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거룩하고 복된 장소였습니다. 


2절에 보면 “첫 장막”이 나오는데, 성막의 첫 번째 방인 성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소 안에는 등대와 진설병이 놓여진 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있었던 히브리 인들 중에는 성소 안을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소 안에 오직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치 가이드가 된 것처럼 성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고, 거기에는 등대와 진설병 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제사장은 매일 저녁마다 불을 켜서 아침까지 성소 안에 밝혔습니다. 진설병은 12개의 무교병을 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안식일마다 새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성소 안을 밝히는 등불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진리로 우리의 심령을 밝히시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빛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생명의 빛과 진리의 빛을 비춰나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진설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께서 희생제물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설병은 12개의 떡이 놓여졌는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주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소에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 곧바로 지성소로 안내해줍니다. 


3-4절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둘째 휘장 뒤에 가려진 지성소 안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에야 성소와 지성소를 묘사한 그림이 많아서 별로 신기할 것이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성소는 미지의 장소였고, 지극히 거룩하고 신비로운 장소인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장소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대부분의 히브리 성도들은 머릿속으로 지성소의 모습을 그리면서 놀라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야 전부 금으로 만들어졌으니 얼마나 반짝이고, 멋있었을까? 죽기 전에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우리가 성막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지성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십계명 두 돌판은 말씀으로 언약을 맺으시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고, 만나 담은 항아리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죽은 영을 살리시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언약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극히 거룩하고 존귀한 성물이었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금향로가 지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에서는 “분향할 제단”이 지성소 휘장 밖에 두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6절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본문은 금향로가 지성소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서 피운 연기를 향로에 담아 두손에 채워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6장 12-13절 

12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언약궤의 뚜껑에 해당되는 속죄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라고 한 것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향연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이 죽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금향로가 항상 지성소 안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매년 대속죄일마다 대제사장이 향로에 연기를 담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연기로 속죄소 위를 가리웠기 때문에 지성소 안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입니다. 속죄소 위에는 영광스러운 그룹들, 즉 천사가 날개를 마주 대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습 자체가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고 해서 “시은좌”라고도 부릅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했던 가장 중요한 의식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일이었습니다. 피가 뿌려지는 장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소와 지성소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성막 안을 그려보면서 환상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지성소보다 더 신비롭고 은혜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환상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찬물을 확 끼얹습니다.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히브리서 저자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옛 언약의 성막에 대한 교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막, 성소와 지성소 안에 들어있는 성물들에 대한 설명과 그 의미는 이미 모세오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그것을 상기 시키려고 성막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말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성막에 속한 성물들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그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막에서 행해지던 제사장들의 행위를 설명합니다. 


6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일반 제사장들은 첫 장막인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항상 행했다고 한 것은 이것이 매일 매일 반복해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소의 등불을 밝혔고, 금향로에 분향을 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진설병을 상 위에 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매일 매일 반복해서 의식을 행해야 했을까요? 반복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항상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하나님과 항상 연결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지만 하나님께로 조금 나아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7절에서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것을 설명합니다. 

7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에 한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열고 지성소 안에 들어갔습니다. 레위기 16장 12절부터 보면 분향단의 향을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소 위를 향연으로 가리고, 자기 죄를 위해서 피를 가지고 들어가고, 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속죄소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림으로써 자기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행했지만 이것 또한 하나님께로 항상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매년 반복했다는 것은 속죄일의 예식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열어주지는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이 내용이 8절에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8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바울이 9장에서 성막 제도에 대해서 언급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이라고 했는데, 우선 이것은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첫 장막인 성소 안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 조차도 성소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지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조차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뿐이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참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동안에는”과 “아직”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영원히 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동안만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이 어느 시점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동안에는”과 “아직”이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영원하고 완전한 단번 속죄로 인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와 죽음과 마귀의 휘장이 완전히 찢어져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옛 언약에 속한 성막 제도가 비유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비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단번 속죄에 대한 비유입니다.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열려진 신약시대, 새 언약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성막은 비유이고,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첫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방편이었지만 모형과 그림자로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모형과 그림자라고 해서 부족하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모형과 그림자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비유로서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귀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형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심까지 온전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식당에 가보면 바깥에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자체로 먹음직스럽습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진열되어 있는 음식을 보고 발길을 돌려 식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진열된 음식 가까이 가보면 작은 글씨가 적혀져 있습니다. “견본입니다. 드시지 마세요”  식당 밖 진열되어 있는 음식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형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길을 가는 손님의 발길을 식당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형 음식이 손님의 배를 부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음식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고 진짜 음식을 사먹게끔 만듭니다. 

이처럼 옛 언약에 속한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자체로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인의 죄를 깨끗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 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주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갖고 제사를 드릴 때 그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지 짐승의 피는 아무것도 씻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를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 율법, 짐승제사를 통해 계시해주셨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구속의 피를 믿는 자가 짐승 제사를 드릴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속죄하시고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개혁될 때까지, 구약의 짐승 제사가 실제로 나타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루어질 때까지 첫 언약의 성막과 제사 제도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모형이며 그림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실체되시는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단번속죄를 이루어 주심으로써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개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선포하셨을 때 성막과 제사제도의 모형과 그림자의 임무가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동시에 구약 제사 제도의 임무도 완결이 되었습니다. 이제 작은 장막에서 매일 매일 등불 켜고 분향하고 매년 법궤 위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뤄주신 영원하고 완전한 단번 속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영원히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주님께서 하늘 지성소에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늘 지성소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주님과 연합되어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 삼중으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가 조심해야 하겠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답게 어떤 환난이 닥쳐 온다할지라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승리하는 생활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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