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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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수요저녁예배 설교 (히브리서 11:8-22 / 믿음의 소망) (윤성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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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11-22 21:22 조회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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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_XoKj3FhyXA?si=OGdkdvYnvJ3bgd48


현실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슨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누가 우리의 마음의 주도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돈, 가치, 명예 등이 자신을 지배하면 헛된 것을 위해 살다가 인생을 끝 마치지만 나를 주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면 주님을 위해 인생을 살게 된다.

주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믿음 밖에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고, 믿음으로 모든 시험을 이겼다. 믿음으로 살면 아무리 험악한 세상을 살더라도 승리하며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8절

"믿음으로" 믿음을 기초로 해서 모든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이 불러주셔야 모든 것이 된다. 하나님이 불러주시지 않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아 순종할 때 마음으로 순종하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때에 나아갈새" 마음으로도 순종해야겠지만 실제로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한 주소가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나야 한다.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서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두번의 부르심이 있었다. 1차는 메소포타미아 남쪽 갈데아우르에 있을 때 부르셨고, 2차는 하란에서 부르셨다. 그때 나이가 75세였다. 2차에 걸쳐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이것은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후손들의 고향이 될만한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데 아브라함이 정확하게 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명령하시는 것을 몸으로 순종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참된 순종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네비게이션도 지도도 없는 상황임에 불구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만 믿고 따라가는 결단을 보였다. 이것이 위대한 믿음의 증거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채 간다는 것은 굉장히 불안한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냥 떠났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우물쭈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하게 가면 돼, 하면 돼 라고 하면 이것이 될지 안될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순종해서 나갔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우리의 삶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도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해서 나아가면 하나님이 명하시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고민이 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면 된다 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9절

"장막에 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지시하셔서 가는 곳인데, 가서 나그네처럼 장막을 치고 살았다. 내 땅이 아니다. 앞으로 받을 약속의 땅이다. 아직은 내 땅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만 받았다. 평생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출애굽한 백성들도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도 약속의 땅을 자기 소유로 삼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뭔가? 네 후손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하겠다는 의믹가 이 속에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처럼 살았다. 우리도 실제적으로 나그네처럼 장막 치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살려는 마음, 세상 것이 다야, 신앙은 적절하게 필요하지만 아쉬움과 고난이 오고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적당하게 산다. 그러나 아브라함 등 족장들은 나그네처럼 살았기에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다.

13절에 "나그네, 외국인"이 나온다.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되는 사람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증언, 고백하기를 나는 나그네, 외국인, 잠시 머물다가 갈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듯 잠시 살다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이는 것이 소중하고 세상에서 잘되고 싶어 한다. 세상 것에 대한 관심, 세상 것에 뿌리를 박고 살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생긴다. 


10절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있을 때 나그네처럼 장막을 짓고 살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성을 기대하고 바라보았다. 우리도 주님의 재림과 천국기업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주님의 재림을 얼마나 대망하고 있는가? 세상에 대한 것보다 하늘에 대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아브라함이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땅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가? 하늘을 바라보라! 주님을 바라보라! 


11-12절

약속하신 이는 미쁘신 분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주셨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셨다. 그래서 사라가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어떤 것은 우리가 평생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내가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13-16절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은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이다. 도중에 그만 두시는 분, 교회 안나오시는 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믿음은 시작하고 믿음을 안써도 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믿지만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 자기 때에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 수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아브라함이 "나의 때" 즉 예수님의 때를 소망하며 즐거워했다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재림과 천국에 대해 소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 죽으면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을 만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주님을 맞이하고 신랑되신 주님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멀리서부터 그것을 바라보고 나아갔다. 

환영한다는 것은 기쁨과 기대감을 갖고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예비하신 성, 예수님의 때에 대한 기대감,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기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 예수님이 피흘려 주신 것은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세상을 이기며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우리의 정체성을 알고 살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본향을 찾아야 한다.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한다. 정말 천국에 가고 싶은가? 주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런데 죽음이 임박해올 때 연기를 요청한다. 세상에 미련이 많다. 주님이 부르시는데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어짜피 갈거라면 항상 죽음에 대해서 본향을 찾는 자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 고향,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왔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두면 안된다. 우리는 여기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 내 아버지가 계신 곳, 앞서간 형제 자매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고 살고 있는가? 그래서 고난을 주시므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고 하늘을 소망하게 만드신다.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이 정상이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19절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바치라고 할 때 바쳤다. 성역을 위해서 바치는 정도가 아니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했다. 약속을 받은 자, 외아들인데 드렸다. 

이삭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 줄로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주실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신자 같으면 왜 하필 나냐고 원망 불평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삭을 바치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약속을 이뤄주실 것을 확신했다. 위대한 믿음이다. 명령하시니까 아무 생각 없이 순종한 것이 아니다. 자기나름대로 생각해서 얻은 답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처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 신앙을 가지면 모든 시대, 모든 환경에 통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확실하게 믿었다. 내 원대로 되지 않더라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가 있기에 그것을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따라 죽고,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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